정민협 개인전
«더 브릴리언트 그린 The Brilliant Green»
2023.07.08 - 07.23
내가 본 것을 다시 보면 *
몇 해 전 강릉의 어느 해변 백사장을 걷다가 모래 위 반짝이는 무언가를 스쳐 가며 보았다. 초록과 주홍과 연보라. 내가 본 것이 궁금해서 뒤돌아선 순간 파도가 밀려와 그게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침에 뛰놀던 아이가 흘린 하리보 젤리이거나
오래전 깨어진 소주병의 닳고 닳은 조각이거나
그보다 더 오래전 누군가 잃어버린 비밀 한 조각이거나
순간 모습을 감추었던 반짝이는 초록의 파편은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상념으로 바뀌어 파도의 밀고 당김에 따라 손바닥 뒤집 듯이 언제 잊었냐며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내가 본 것은 초록과 주홍과 연보라인데, 어느새 그것은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보고 있는 것으로 재생한다.
작가는 길을 걷다가 시선을 끄는 풍경을 마주치면 이를 짧은 시간에 수첩에 옮기고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는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잔상이 사라지지 않으면 종이 위에 그림으로 옮긴다.' 그는 별다른 재료가 아닌 먹과 물감을 사용하여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장면을 그리는데, 특이한 것은 물을 사용해 안료를 들어오고 나가는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알처럼 종이 위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먹과 안료는 입자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어떠한 것은 빠르게 고착되고 어떠한 것은 흔들리는 파도에 휩쓸리면서 물이 마르기를 기다린다.
그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대구에서 한동안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채 지냈고, 한지에 그리는 큰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지고 있던 작은 켄트지에 먹으로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지 위에 먹이 번지는 효과를 주기 위해서 켄트지를 물에 적시고 그렸는데, 이러한 시도가 <흔들흔들, 2021>, <계절의 파노라마, 2022> 연작에서 팬데믹 시기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을 일상의 모습을 번지고 흔들리는 화면으로 그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젖어있는 종이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아무리 섬세하게 그려도 그것은 점차 번져서 형태가 망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젖어 있는 종이 역시 언젠간 마르고, 번짐 또한 어느 순간에서 멈춰서 흐릿한 형태로 하나의 그림으로 남게 된다. 모든 기억은 처음에 선명하게 새겨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흐려지기 시작한다. 이처럼 물과 안료를 매개로 종이 위에 작가가 소환해 놓은 흐릿한 이미지들은 내가 본 오늘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이미 지나간 오늘의 회상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나는 안료가 과거의 어느 빛을 안고 있는 것 처럼.
오늘을 구성했던 일들은 이미 '오늘'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으므로 그립다. 그리움은 과거가 된 오늘을 다시보게 하는데, 이미 멀어지고 사라진 것들이 남긴 빈 곳에는 흡족함, 편안함, 아쉬움, 서글픔, 애틋함과 같은 형용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형용하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물이 마르고 난 화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흔적들이다.
그 해 여름 보았던 빛나던 초록은 비를 맞으면 은은해졌고 밤이오면 어두워졌다. 가을엔 서서히 초록을 벗어 버리더니 겨울이 되자 회색이 되었다. 내가 보았던 초록은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유진목 시인이 수필집 <슬픔을 아는 사람>에서 "나는 내가 본 것을 다시 보기 위하여 하노이로 떠났다. 살면서 내가 잘한 일이 있다면 불행한 내가 본 것을 행복한 내가 다시 보기 위해 몸을 움직여 멀리 떠난 것이다."라고 적은 것에서 가져왔다.
1. 2022년 작가노트 발췌
2. 2021년 작가노트 발췌


작가노트, 2023
내가 지금까지 작업에서 말하고 싶었던 점은, '흐려지는 과정에서 멈춰버린
그림'을 통해 '자꾸만 과거로 회귀하려는 듯 하나 돌아갈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어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특정 장소'의 '어느 시간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진이 없는 막연한 기억에 대해서, 우리는 스
스로 단서를 떠올려야만 한다. 멀리서 들려오던 빌딩 사이의 소음 혹은 수풀
속 동물 울음 소리, 그리고 비가 엄청 많이 오는 날 습한 지하철과 냄새 등
우 리는 그렇게 외부의 다양한 요인으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은 이미 돌아올 수 없다는, 다시는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슬프게 느껴진다.
처음 작업을 시작 했을 때, 나는 감정에 대해 기억이 가지는 특성에 대해
생각했다. 젖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이것이 번지고, 또 멈추는 과정을 통해
나오는 흐릿한 상을 만드는 과정이 위에서 기억의 특성과 일치한다고 생각 한
것이다. 그리고 작업을 지속할 수록, 공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장지 속에서 그
림이 번져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아주 구체적이고, 필연적으로 움직이는 과정
이다. 안료는 장지 속으로 스며들고 물은 스며든 안료를 더 멀리, 깊은 곳까지 밀어낸다. 그리고 그 물 속으로, 다시 안료가 침투한다.
기존의 동양 회화가 일종의 균질성을 가졌다면, 이러한 그림의 그리기 방법은
균질성을 해체하고 다시 회화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붓질
의 흔적은 물로 지워진 듯 하지만 붓의 길이와 붓을 운용하는 속도, 다양한
요인을 통해 번짐을 조절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붓의 운용이 다시금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은 어쩌면 먹을 침투 시키는 것 보다 표류시키는 과정이라고 해
야 옳을 지도 모른다.
작업에서 나타나는 풍경들은 우리가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의 장면들이
다. 흐릿한 모습을 통해 언제였는지 모를 아련한 장면들을 생각하고 싶다. 개
학식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 4-5시쯤 육교 위에서 봤던 풍경, 주말 오전에 가
족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혼자 깨어나 어색함을 느끼던 기억 등, 여전히 존재
하는 회화의 아름다움과 시간의 슬픔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함께 만든 사람들
작가: 정민협
기획: 백승현
글: 백승현
촬영: 백승현
포스터디자인: 정민협